한류의 이면은 강간문화

한류의 이면이 강간문화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강간문화의 역사는 유구하다. 제우스는 칼리스토를 임신시키고 헤라가 칼리스토를 박해하자 칼리스토를 밤 하늘의 큰곰자리로 만들어 항해자들의 길잡이가 되게 했다. 그 본질은 위력에 의한 간음(신 중의 신과 님프 사이에 위력이 없을 리 있겠는가)으로 따먹은 전리품을 하늘에 올려 동네방네 자랑하고 논 것 아니겠는가? 신 중의 신, 우상 중의 우상마저 저랬을 진대, 오늘날의 아이돌들이 남몰래 그러고 놀았다는 것은 새삼 놀랄 일도 아닌 듯 하다. 이처럼 아이들에게 해로운 강간문화를 전수하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마땅히 금서로 지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바로 그래서 중세 기독교는 희랍인들의 모든 우상들의 뚝배기를 깨부수고 다녔던 것이다. 그래서 희랍인들의 신상의 태반이 모가지가 없다.

제우스가 신 중의 신이었던 것은, 천둥벼락의 신인 때문이 크지만, 일단은 법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 법의 신에 관한 일화의 태반이 위력에 의한 간음이다.

아니다. 제우스는 여신과 님프들과 간음할 때 위력을 과시하지 않고 숨겼다. 레다에게는 백조로 변신해 품에 파고들고, 다나에게는 황금비가 되어 내리고, 세멜레에게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숨기고, 알크메네에게는 남편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래봤자 죄질이 뭐가 다른가? 형법상 위력에 의한 간음과 위계에 의한 간음은 한 조항에 규정되어 있다.

법의 신부터가 위계 내지 위력에 의한 간음의 상습법이었는데 법이 어떻게 강간문화를 단죄하고 처벌할 수 있겠는가? 사법이야말로 어쩔 수 없이 강간문화의 공범인 것은 아닌가? 이것이 법원 앞에 가서 주저앉아서, 법을 바로 세우라, 소리치며 사법부를 다그쳐서 극복될 일인가?

헬레니즘의 법이 이 모양이라면, 헤브라이즘의 법은 아주 단호하게, 여자를 향해 음욕을 품는 자는 그 눈을 도려내고, 왼손이 죄를 저지르면 오른손도 모르게 왼손을 절단내라고 준엄히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시선강간까지 강력하게 단죄! 펜스룰이 한 때 유행했는데, 마이크 펜스, 그는 다름 아닌 미국의 황교안이라 해야 할 복음주의 기독교 정치인의 전형이다.

펜스룰은 지극히 이분법적이다. 펜스룰은 중간을 모른다. 펜스룰은 여성과 적절히 상호작용하면서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넘지 않는, 그 ‘중간’을 모르는 남성들을 위한 지극히 방어적인 룰이다: 가족말고는 상호작용하지 말 것!

그런데 이러한 펜스룰의 이분법성, 일도양단성의 미덕은 단순성이다. 단순성, 그것이야말로 모든 룰=규칙=법의 미덕이다. 대마는 쓰임에 따라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으나 법은 일도양단, 일괄하여 금지해버린다. 대마의 유익함은 취하고 해로움은 버리는 중간 같은 것은 없다. 19세 미만의 고등학생 중에도 투표할 역량이 있는 현명한 고등학생들이 있을 테고, 반대로 투표권을 주어서는 안 될 20세는 수두룩 해 보이는데, 선거법은 민증으로 단칼에 잘라 버린다. 투표 자격이 충분한 19세는 투표권을 주고, 투표 무자격자인 20세는 투표권을 안 주는 중간 같은 것은 없다.

펜스룰을 포함한 룰은 단순하기에 명확하고, 예측가능하고, 자의적이라는 혐의를 피할 수 있다. 단순하기에, 입법자(세우는 자)도, 집행자(적용하는 자)도, 법관(선언하는 자)도,
수범자(지키는 자)도, 애매함 없이 판단할 수 있다. 가족 아닌 여자를 쳐다보면 일단왼쪽 눈을 도려내는 것이다. 가족 아닌 여자를 만지면 일단 그 손을 절단하는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의 어느 한 섬에서는 야자수 밑에서 잠을 자지 말라는 법이 있다고 한다. 왜인가? 야자수 밑에서 잠을 자다가는 야자열매가 떨어져서 뚝배기가 깨져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자수 밑에서 잠을 자다가 야자열매가 떨어져서 뚝배기가 깨져 죽을 확률은 1/1,000,000,000 쯤 될까? 그러나 야자수 밑에서 잠을 자지 말라는 법을 지키면 죽을 확률이 1/1,000,000,000에서 0으로 줄어드는 것이다. 999,999,999/1,000,000,000 의 확률로 뚝배기가 깨지지 않으면서 야자수 밑에서 잠을 잘 수도 있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자기는 선을 넘지 않으면서 여성과 상호작용하는 중간을 안다고 착각하고 자기는 999,999,999/1,000,000,000에 해당한다고 착각하고 다니다가 뚝배기가 깨지는 것이다. 미투를 지지하고 여성과 연대한다던 여성 정당 민주당의 지지자 바이든은 미투로 낙마하게 생겼다. 반면 가족 아닌 여자와는 밥약을 잡지 않는다는 복음주의 기독교인 마이크 펜스에게 미투가 제기될 확률은 1/1,000,000,000이 아닌 0으로 보인다.

펜스룰과 같은 룰의 또 다른 특징은 ‘부정성’이다. via negativa.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금법이다. 뭔가를 ‘하라’는 작위의 명령이 아니라, 뭔가를 ‘하지 말라’는 부작위의 명령이다. 모범을 권장하는 soft law가 아니라, 불법을 엄금하는 hard law다. 적어도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고대법은 대부분 hard law다. via negativa다. 부작위의 명령이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나만 섬겨라’가 아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다. 그리고 제10계명까지 줄줄이 ‘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고조선의 법은 8조 금법이었다. 역시 다 금법이다.

펜스룰도 금법이다. 펜스룰은 ‘모든 여성과 적절히 상호작용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가족 아닌 여성과 상호작용하지 마라’고 명령한다. 페미니스트 남자의 모범을 제시하는 soft law가 아니다. 어줍잖은 페미니스트 남자가 될려고 하지 말고, 그냥 가족 아닌 여자와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hard law다. soft law를 따라 페미니스트 남성인 척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를 붙이던 남자들(안희정, 바이든, …) 은 줄줄히 미투에 걸리고 있다. 반면 펜스룰을 따르는 마이크 펜스는 절대 욕은 쳐먹을 지언정 미투에 걸릴 일은 없다.

최초의 법은 hard law다. via negativa다. 먹히는 법은 다 hard law다. soft law는 안 먹힌다. 엄마는 아이에게 ‘위험한 짓 하지 마!’라고 하지, ‘안전한 짓을 해라!’고 하지 않는다. 전자는 먹히고 후자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이에게 ‘거짓말하지 마!’라고 꾸짖지, ‘더욱 더 진실되어라!’고 하지 않는다. 전자는 먹히고 후자는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해!’ ‘선생님에게 더더욱 잘 보여!’라고 요구하는 부모는 실패한다. ‘결석하지 마!’ ‘숙제 미루지 마!’ ‘선생님 말 어기지 마!’ ‘최소한 룰 어기지 마!’라고 금지하는 부모가 성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공의 비결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안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공부의 비결은 없다. 단지 비효율적인 공부방법을 안 하다 보면 성공할 따름이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하나요? 질문이 틀렸다. 뭘 해야 하는지를 묻지 말고 뭘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공부가 아닌 것들을 안 하다 보면 공부를 잘 한다.

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권리장전’은 hard law다. 명예혁명을 계기로 영국의 귀족들은 왕을 찾아가 권리장전을 면전에 들이 밀고 서명을 강요했다. 그 권리장전의 내용은 hard law다. via negativa다.

‘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지 마’ ‘왕은 법을 어기는 명령을 내리지 마’ ‘왕은 재판 없이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지 마’

다 뭐 하지 마라는 내용이다.

반면 오늘날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만든 ‘인간과 시민의 권리의 선언’은 추상적인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모든 시민은 재산권이 있다’ ‘모든 시민은 존엄이 있다’ ‘모든 시민은 신체의 자유를 갖는다’

프랑스의 헌법을 본받은 우리의 헌법 역시 인간의 권리를 열거한다. 우리는 재산권이 있고, 존엄할 권리가 있고, 신체의 자유에 대한 권리가 있다.

반면 헌법이 없는 영국의 법은 권리를 열거하지 않는다. 대신 국가를 금지한다. ‘국가는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걷으면 안 된다’ ‘국가는 법을 어기는 명령을 내리면 안 된다’ ‘국가는 재판 없이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면 안 된다’

오늘날 영국은 브렉시트로 휘청이고 있고, 프랑스는 노란조끼로 들썩하고 있다.

Hegel begins

It is not Who I am underneath but What I do that defines me

Who I am underneath is not what defines me

(Essence) (Definition, Concept of Being)

What I do is what defines me

(Action, movement) (Being)

Essence is not Concept of Being

Action is Concept of Being

Concept of Being is Action but not Essence

[넋두리]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바이스(vice)를 보러 가기…

신진 연구자 발표하기…

그래서 해야 할 일 – 행정법, 신형사소송법 구입해 읽어나가기 시작 + 회사법 재독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 잘 살아내야 하는데

죽음을 생각할 수록 조바심이 나거나, 삶이 부질없거나, 삶을 헛 산 듯 하거나 하다면,

몽테뉴의 조언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세네카에 귀기울이기를 멈추고, 그저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잘 살아오지 않았는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아가지 않겠는가?

“실익 있는” 글을 쓰자고,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형편을 갖추자고, 법대에 왔는데 정작 글을 쓰지 않으니 이는 주객전도 아닌가? 목적의 망각 아닌가?

ㅇㅈㅎ ㅈㅅㅈ ㄴㅎㅅ 처럼 되고 싶지 않다.

누구처럼 되고 싶다 보다도 누구처럼 되고 싶지 않다. 무엇을 하고 싶다 보다도 무엇은 하고 싶지 않다.

2019 – 1의 문제 의식

문제의식 1 – 지상파 방송의 점유율이 나날이 추락하고 있다. 미디어 환경에서 공영방송 제도의 의의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이 제도의 지탱을 정당화해 온 학계, 전문가, 시민단체, 옹호자 연합이 형해화되는 날도 올 수 있다. 그 날이 오면 이 제도의 소멸 내지 변경이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선택지가 될 것이다. 공영방송의 민영화 내지는 해산, 민영방송과의 합병 등이 문제될 것이고, 그 법적 절차에 대한 지식이 긴요해질 것이다. 민법, 도산법, 회사법, 행정법(의 지방자치법 중 공기업법)을 두루 두루 읽으며 실무 경험을 쌓으며 준비해 두어야 한다. 방송의 관리 감독을 위한 방송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정책 기관들도 아울러 탈방송 방향으로 일대 재편되어야 할 것이다.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공공성’을 포기하지 않는 새로운 미디어 정책 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문제의식 2 – 인터넷 내용 규제의 헌법 이론적 정당화 가능성이 있는지, 인터넷 내용 규제를 어떤 제도로 보완한다면 헌법 이론적 정당화 가능성이 높아지는지? 인터넷 내용 규제를 전담하는 독립적인 행정 기관의 법적 지위는 무엇이고, 그 행위의 법적 성질은 무엇이며, 시행착오에 대한 법적 평가는 어떠해야 하고, 그 법적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헌법과 행정법을 다시 살핌과 동시에, ‘독립’과 ‘책임’의 의미에 대한 민법, 형법, 공법의 이해를 총체적으로 검토한다.

결국 법치국가에서 ‘제도’와 제도의 ‘행위’는 법의 언어로 공식화되어야 한다. 법치 국가에서는 법이 사회 체계 간을 매개하는 부호(code)다. 결국에는 법을 알아야 위의 두 문제에 대한 ‘실익’이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미디어학의 언어로는 미디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미디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법학의 언어를 알아야 한다. 공영방송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할 수 있지만, 공영방송이 파산하면 어떤 법 효과가 발생하고 어떤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법의 언어를 모르면 해결책을 모른다. 인터넷 내용 심의의 옳고 그름에 대한 주장을 할 순 있지만, 그래서 내용 심의 기구의 지위와 내용 심의의 성질이 법적으로 무엇이 되어야 하며 어떤 구속과 책임이 따르는 지 법의 언어를 모르면 해결책을 모른다. 미디어학자들은 미디어가 나아가야 할 이상을 제시하는데, 그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고 추락하는 미디어(그리고 그 미디어의 패배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들)의 최악의 경우를 어떻게 구제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